IT 핫픽 - 원유 확보가 중요한 이유

반도체·AI 시대의 숨은 경쟁

호르무즈 해협과 무산담 반도. 최근 미국,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란이 전 세계 원유 물동량 20%가 지나는 이 해협을 봉쇄했다. / NASA
호르무즈 해협과 무산담 반도. 최근 미국,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란이 전 세계 원유 물동량 20%가 지나는 이 해협을 봉쇄했다. / NASA

우리나라가 UAE(United Arab Emirates)로부터 원유 1,800만 배럴을 추가로 확보했다는 뉴스 봤을 거예요.

대통령 비서실에 따르면 이번 물량 가운데 일부는 UAE 국적 선박을 통해, 나머지는 우리나라 선박을 통해 순차적으로 국내에 들어와요.

이로써 최근 중동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도, UAE로부터 이전 계약분 600만 배럴을 포함해 총 2,400만 배럴의 원유를 확보하게 됐죠.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가 왜 이렇게 원유 확보에 힘쓰는 걸까요?

원유는 그저 '연료'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유를 자동차나 비행기의 연료로만 생각하기 쉬워요.

사실 원유는 현대 산업 구조 전체를 움직이는 정말 핵심적인 자원이에요.

원유는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정제 과정을 거쳐 다양한 석유화학 제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죠.

대표적으로 플라스틱, 합성섬유, 고무, 페인트, 접착제 등이 모두 원유에서 시작된답니다.

이러한 소재들은 스마트폰, 노트북, 반도체 장비, 전기차 부품 등 거의 모든 첨단 산업 제품에 사용돼요. 예를 들어 반도체 장비 내부의 케이블 피복, 회로 보호 소재, 장비 외장 등에도 석유화학 제품이 들어가요.

게다가 의료용 장비, 포장재, 생활용품까지 원유 기반 소재가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에, 원유 공급이 불안하면 에너지 가격은 물론 산업 전반의 생산 비용도 함께 올라가게 되죠.

결국 원유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산업의 재료이자 에너지'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는 자원이에요.

UAE 할리바 광구. 할리바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는 호르무즈 해협 외곽에 있는 터미널로 이송·저장되기 때문에, 해협이 봉쇄되는 위급 상황에서도 국내로 원유를 들여오는 것이 가능하다. / 한국석유공사
UAE 할리바 광구. 할리바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는 호르무즈 해협 외곽에 있는 터미널로 이송·저장되기 때문에, 해협이 봉쇄되는 위급 상황에서도 국내로 원유를 들여오는 것이 가능하다. / 한국석유공사

반도체 산업 뒤에 숨은 '에너지 전쟁'

특히 첨단 산업 중에서도 반도체와 같은 기술 집약적 산업에서는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과 원유 기반 소재가 있어야 생산이 원활하게 돌아가요.

겉으로 보면 첨단 기술 경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에너지 경쟁이 자리하고 있죠.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가동돼요. 특히 초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온도, 습도, 전압까지 매우 정밀하게 유지해야 하기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예요.

전력이 순간적으로라도 끊기면 생산 중인 웨이퍼 전체를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요. 이 때문에 반도체 기업들은 자체 발전 설비를 구축하거나, 국가 차원의 전력 안정성에 크게 의존하죠.

이런 전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많은 국가들이 화석연료 기반 발전에 의존하고 있어요. 재생에너지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안정적인 대규모 전력 공급 측면에서 화석연료의 비중이 커요.

현대삼호중공업에서 건조한 원유운반선(VLCC)의 시운전 모습. 원유운반선은 원유를 안전하게 공급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 HD현대
현대삼호중공업에서 건조한 원유운반선(VLCC)의 시운전 모습. 원유운반선은 원유를 안전하게 공급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 HD현대

또한 반도체 공정에는 수백 가지 이상의 화학물질과 특수 소재가 필요해요. 이 가운데 상당수는 석유화학 산업과 연결되어 있어요.

원유는 정제 과정을 거쳐 나프타로 전환되고, 이후 에틸렌·프로필렌 같은 기초 화학물질로 분해돼요. 이런 물질들은 다시 다양한 화학소재로 가공되며,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핵심 재료로 활용되죠.

회로 형성에 사용하는 감광 물질인 포토레지스트는 석유 기반 유기화합물로 만들어지며, 웨이퍼를 세정하는 데 쓰이는 용매 역시 대부분 석유화학 공정을 통해 생산돼요.

극자외선(EUV) 공정과 같은 첨단 반도체 기술에서도 이런 화학소재의 정밀도와 품질이 생산 수율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꼽혀요.

결국 원유 가격이 급등하거나 공급이 불안해지면, 전력 비용 상승과 소재 가격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반도체 생산 비용이 크게 증가할 수 있어요. 곧 글로벌 반도체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죠.

2023년 3월 21일, 아부다비국영석유사(ADNOC) 선박이 여수비축기지에 입항했다. 한국과 UAE는 2023년 1월 국제공동비축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국제공동비축은 한국석유공사가 비축 저장시설을 산유국에 임대하고, 유사시 한국이 해당 물량을 사용할 수 있는 우선 구매권을 확보함으로써 국가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사업이다. / 한국석유공사
2023년 3월 21일, 아부다비국영석유사(ADNOC) 선박이 여수비축기지에 입항했다. 한국과 UAE는 2023년 1월 국제공동비축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국제공동비축은 한국석유공사가 비축 저장시설을 산유국에 임대하고, 유사시 한국이 해당 물량을 사용할 수 있는 우선 구매권을 확보함으로써 국가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사업이다. / 한국석유공사

AI 시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

최근 들어 에너지 문제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인공지능(AI)의 급격한 성장 때문이에요.

AI 모델은 데이터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연산을 수행해요. 수천 개의 고성능 그래픽 처리 장치(GPU)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엄청난 전력이 소모되죠.

대형 AI 모델의 경우, 한 번의 학습에 수천 가구가 사용하는 전력량에 맞먹는 에너지가 들어가기도 해요. 여기에 AI 서비스를 실시간으로 제공하기 위한 데이터센터 운영까지 더해지면서 전력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어요.

데이터센터는 단순히 서버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냉각 시스템, 전력 관리 시스템, 네트워크 장비 등이 함께 작동하는 복합 시설이에요. 이 모든 장비가 동시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매우 중요하죠.

최근 글로벌 IT 기업들이 자체 발전소를 구축하거나, 특정 지역에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집중적으로 짓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가 AI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 거예요.

한국석유공사 서산 비축기지 전경. 2025년 6월 23일, 한국석유공사는 호르무즈 해협 등 중동 정세가 불안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석유 수급 안정성을 점검하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 / 한국석유공사
한국석유공사 서산 비축기지 전경. 2025년 6월 23일, 한국석유공사는 호르무즈 해협 등 중동 정세가 불안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석유 수급 안정성을 점검하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 / 한국석유공사

공급망 불안, 왜 '원유 확보 경쟁'으로 이어질까

원유는 특정 지역에 매장되어 있어 국제 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아요.

중동 지역은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지 중 하나로, 이 지역의 정치적 긴장이나 분쟁은 곧바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파장을 일으키죠.

원유 수송로가 차단되거나 생산이 감소하면 국제 유가가 급등하고, 이로 인해 전 세계 산업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쳐요. 전기 요금 상승, 물류비 증가, 제조 비용 상승 등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어요.

이 같은 공급 충격이 반복되면서 각국은 특정 지역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급선을 다변화하고 있어요. 여러 나라와 동시에 계약을 맺거나,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전략이 대표적이에요.

이에 함께 비상 상황에 대비해 일정량의 원유를 비축하는 전략도 병행하고 있어요. 이렇게 확보한 원유는 단기적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돼요.

반면 미국과 같은 에너지 강국은 자국 내 생산 기반을 바탕으로 국제 에너지 시장의 가격과 공급 안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요.

이는 미국이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로서 국제 유가와 공급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주요 산유국과의 외교, 제재 정책, 공급 조절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글로벌 에너지 흐름에 관여하며 시장 안정과 자국 경제 보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어요.

이처럼 각국은 자국의 에너지 구조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에너지 확보와 관리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아요.

여수 석유비축기지. 지하동굴 규모는 높이 30m(아파트 12층 정도), 폭 18m, 연장(동굴 길이) 14km에 달하며, 환경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굴 내에 최첨단 원유 가스 배출 제어설비를 구축했다. / 한국석유공사
여수 석유비축기지. 지하동굴 규모는 높이 30m(아파트 12층 정도), 폭 18m, 연장(동굴 길이) 14km에 달하며, 환경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굴 내에 최첨단 원유 가스 배출 제어설비를 구축했다. / 한국석유공사

기술 경쟁의 핵심은 '에너지'

과거에는 반도체 기술력이나 소프트웨어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여겨졌죠. 하지만 요즘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에너지 확보 능력'이 함께 중요해지고 있어요.

AI, 반도체, 데이터센터 산업은 모두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에요.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어요.

이런 이유로 일부 국가는 원유뿐 아니라 천연가스, 원자력, 재생에너지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에너지 전략을 강화하고 있어요. 에너지 믹스를 다양화해 특정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시도죠.

글로벌 기업들도 에너지 확보를 중요한 경영 전략으로 보고 있는데요. 발전소 투자, 장기 전력 구매 계약, 친환경 에너지 확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에너지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어요.

결국 미래의 기술 경쟁은 '누가 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느냐'에서 '그 기술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에너지를 확보했느냐'로 확장되고 있어요.

앞으로는 반도체와 AI 경쟁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국가 간 에너지 확보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여요.


최성훈 기자 csh87@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