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년에 왜국의 괴수들이 창궐했을 때 영남 지역의 고립된 한 성이 겹겹이 포위를 당해 금방이라도 함락될 위기에 처했습니다.「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 중에서
이때 성주와 매우 친한 사람 중에서, 평소 아주 색다른 기술을 지닌 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비거를 만들어 타고 성안으로 날아 들어가, 벗을 태워 성 밖으로 30리를 비행한 뒤 착륙해 왜적의 칼날을 피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조선의 하늘에 비행기가 날았어요. 바로 정평구가 개발한 '비거(飛車)'입니다.
사람과 물자를 하늘로 옮기며 전투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지는 이 발명품은 오랫동안 역사 속 전설로만 남아 있었죠.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속 「비거변증설」에 비거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글만으로는 비거가 실제로 어떻게 날았는지를 알기 어려웠어요.
한국과 러시아에서 항공 공학을 연구한 저자 이봉섭은 이 기록을 단서로 삼아, 조선의 전통 과학 기술과 현대 항공 공학을 결합해 비거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이 책은 1부에서 비거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정평구의 삶, 임진왜란 속에서 비거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봅니다.
2부에서는 저자가 직접 각종 문헌과 실험 자료를 바탕으로 비거를 복원한 과정을 담고 있어요. 동체, 날개, 꼬리날개, 추진 장치 등 각 부분의 구조와 원리를 세세하게 검증하고, 옻칠, 한지, 대나무 등 조선 시대 재료의 실용성을 현대 항공 과학 관점에서 분석했습니다. 전통 한선의 돛 구조가 현대 비행기 날개 구조와 흡사하다는 사실도 밝혀, 비거의 비행 원리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했죠.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400여 년 전 조선에서 날았던 비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역사와 기술, 과학이 만나 탄생한 진짜 비행기였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요.
이봉섭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종이책 1만9500원, 전자책 1만4500원
최성훈 기자 csh87@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