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온에서 꽁꽁 어는 새로운 얼음 찾았다…표준연, 세계 최초 '얼음21' 규명

새로운 결정화 경로와 상온 얼음21 발견
우주 생명 탐사·신소재 개발 새 지평 열어
KRISS 김민주 박사후연구원(좌)과 이윤희 책임연구원(우)이 동적 다이아몬드 앤빌셀 장치를 통해 구현한 초과압수의 결정화 과정을 관찰하고 있다.
KRISS 김민주 박사후연구원(좌)과 이윤희 책임연구원(우)이 동적 다이아몬드 앤빌셀 장치를 통해 구현한 초과압수의 결정화 과정을 관찰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얼음은 섭씨 0도씨(℃) 이하에서 만들어지죠. 하지만 과학자들은 지난 120여년 동안 영하의 온도가 아닌 상황에서도 얼음이 얼 수 있음을 연구를 통해 증명해왔어요. 그 얼음 가지수가 무려 20가지나 됐죠.

그런데 이번에 우리나라 연구진이 지금까지 연구된 20가지 얼음과는 또 다른 얼음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견했어요. '얼음 21(Ice XXI)'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어요.

이는 물과 얼음의 복잡한 구조와 생성 과정을 제어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구상에 없던 신소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죠.

한 세기 이상 진행되고 있는 Ice I부터 Ice XX까지 얼음상 발견의 역사.
한 세기 이상 진행되고 있는 Ice I부터 Ice XX까지 얼음상 발견의 역사.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은 상온에서 2만 기압(2㎬)이 넘는 초고압 상태의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과정을 마이크로초(μs, 100만분의 1초) 단위로 관측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 결과,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물의 결정화 경로와 21번째 결정상인 '얼음 21(Ice XXI)'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죠.

0도씨(℃) 이하에서 물이 결정화되면서 생기는 얼음은 상온이나 심지어 물이 끓는 고온에서도 생길 수 있다는 게 그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해 증명돼 왔어요. 액체가 고체로 변하는 결정화 현상은 온도뿐만 아니라 '압력'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상온에서 물은 '결정화 압력'인 9600기압(0.96㎬) 이상의 압력을 받으면 얼음으로 상(相, Ice VI)이 변하죠.

물이 얼음으로 변할 때, 물 분자 간의 수소결합 네트워크가 온도와 압력에 따라 복잡하게 왜곡, 재배열되면서 다양한 얼음상을 동반하는 결정화 과정이 나타나요. 물과 얼음의 복잡한 상전이 및 구조형성 과정을 이해하고, 그 과정을 극한 수준의 압력과 온도로 제어하면 지구상에 없던 신소재를 만들어 낼 수 있죠.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은 한 세기 이상 온도와 압력 조건을 조절하여 20가지의 결정질 얼음상을 발견해 왔어요. 얼음상을 발견한 온도와 압력의 범위는 각 2000 켈빈(K) 이상과 100만 기압(100㎬) 이상까지 넓게 형성되어 있어요. 그중 대기압(0㎬)부터 2만 기압 사이의 영역은 물의 상전이가 가장 복잡하게 생기는 핵심 영역으로 10개 이상의 얼음상이 밀집돼 있죠.

KRISS 우주극한측정그룹은 자체 개발한 '동적 다이아몬드 앤빌 셀(dDAC)' 장비를 이용해 상온에서 2만 기압 이상까지 물이 액체로 존재하는 즉, 결정화 압력의 200%가 넘는 초과압(Supercompression) 상태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어요.

여기서 동적 다이아몬드 앤빌 셀(dynamic Diamond Anvil Cell, dDAC)이란 머리카락 굵기의 미세한 구멍이 뚫린 금속 개스킷에 시료(물)를 넣고 한 쌍의 다이아몬드로 막은 후, 미세 변위제어 장치(피에조 액츄에이터)를 이용해 구멍 내에 초고압을 발생하는 장치예요. 액츄에이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동적, 연속적인 압력의 증감은 물론 압력의 원격제어와 시료의 광학적·분광학적 동시 관측이 가능하죠.

KRISS 연구진이 초과압 상태를 구현하기 위해 사용한 동적 다이아몬드 앤빌 셀 장치 내부. 한 쌍의 다이아몬드 앤빌이 보인다.
KRISS 연구진이 초과압 상태를 구현하기 위해 사용한 동적 다이아몬드 앤빌 셀 장치 내부. 한 쌍의 다이아몬드 앤빌이 보인다.

종래의 다이아몬드 앤빌 셀(DAC) 장치는 연구자가 수동으로 DAC 조립볼트의 체결정도를 달리하여 압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압력을 가하는 과정에서 결정화가 금세 이뤄져 결정화 압력을 크게 뛰어넘는 과압을 형성하기 힘들었어요. 이에 비해 KRISS가 개발한 dDAC은 가압 시 충격을 최소화하는 미세 변위제어 장치를 적용하고, 기존 수십 초의 압축 시간을 10 밀리초(ms, 1000분의 1초)까지 단축했어요. 이로써 물이 얼음으로 바뀌어야 하는 결정화 압력을 크게 넘어선 2만 기압 이상에서도 액체 물이 준안정 상태로 유지되는 초과압수를 형성할 수 있었어요.

KRISS 연구팀은 세계 최대 규모의 X선 레이저 시설인 '유로피언 XFEL'을 통해 초과압 상태의 물이 결정화되는 과정을 마이크로초 시간 분해로 관측했어요. 그 결과 상온에서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5가지 이상의 결정화 경로를 발견하고, 해당 경로를 분석해 21번째 결정상인 '얼음 21(Ice XXI)'을 세계 최초로 확인할 수 있었어요.

KRISS 우주극한측정그룹 이윤희 책임연구원은 “얼음 21의 밀도는 목성과 토성의 얼음 위성 내부에 존재하는 초고압 얼음층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이번 발견이 극한 환경에서 우주 생명체의 근원을 탐색하는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어요.

우주극한측정그룹 이근우 책임연구원은 “자체 개발한 dDAC 기술과 XFEL을 융합해 기존 장비로는 접근 불가능했던 찰나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며 “ 초고압과 같은 미지의 극한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노력이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감을 밝혔어요.

이번 연구성과는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 머터리얼즈에 이달 게재됐어요.

최정훈 기자 jhchoi@etnews.com